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릴레오 갈릴레이 (문단 편집) === 남동생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=== 갈릴레오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는데, 이름은 '''미켈란젤로 갈릴레이'''(Michelangelo Galilei, 1575~1631)였다. 약 100년 전에 태어난 위대한 예술가인 [[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]]와는 다른 인물이다. 형 갈릴레오와 11살 차이가 나는 어린 동생으로, 당시 유명한 작곡가이자 음악 이론가였던 아버지 빈첸초 갈릴레이의 뒤를 따라 작곡가가 되었다. [[이탈리아 반도]] 출신이었지만 주요 활동 지역은 동유럽의 강대국이었던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와 중유럽에 위치한 [[신성 로마 제국]]의 남부 지역 강국이었던 [[바이에른 선제후국]]이었다. 그는 20대 초반에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로 가서 [[리투아니아 대공국]]의 유력 귀족이었던 라지비우 가문에 고용되어 [[크라쿠프]], [[그단스크]], [[토룬]], [[빌뉴스]] 등지에서 일했다. 한편 그는 고향 [[피렌체]]를 다스리던 [[메디치 가문]]의 궁정 음악가에 지원했지만 여러 번 고배를 마시면서~~ 그냥 쌩까고 취업난은 역사가 깊다~~ 일터가 있었던 폴란드에서 한동안 일하다가 바이에른 공작 [[막시밀리안 1세(바이에른)|막시밀리안 1세]][* 1623년에 바이에른 [[선제후]]가 되었다.]에게 고용되어 [[뮌헨]]으로 일터를 옮겼다. 그 후 그는 8명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. 미켈란젤로 갈릴레이의 음악은 힘차고 웅장한 음률이 특징이며, 즉흥적이고 빠른 음색이 특징인 '토카타'(toccata) 형식이 주를 이룬다. [[미국]]의 음악가 폴 베이어(Paul Beier)가 1620년 미켈란젤로 갈릴레이가 펴낸 악보집인 《Il primo libro d'intavolatura di liuto》를 [[음반]]으로 제작했다. 쾌활하고 진취적인 그의 음악성과는 달리 형 갈릴레오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, 그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갈릴레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빌렸기 때문이었다. 그가 갈릴레오와 주고 받은 편지들에 따르면, 그는 그의 아들[* 이름이 '빈첸초'(Vincenzo)로 갈릴레오의 아들과 이름이 같다. 헷갈리지 말길.]의 사정이 어려움을 들어 형에게 자주 돈을 빌리기를 요청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